책을 읽었다. 기적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그런 뻔하디 뻔한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전형적인 클리셰의 범벅인 책은 신선하지도 않은 따분한 소설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게 된 것은 네가 이 책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생각해서일까.
이 세상이 한 폭의 이야기라면, 너는 분명 이 이야기의 주인공일 것이다. 네가 일으킨 사건이 얇은 회색 종이 쪼가리에 담겨 바다에 곳곳에 흩뿌려지며 이름을 떨쳤을 때, 세상을 무대로 한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라는 세상의 흐름이 있다면, 너는 분명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었겠지.
비록 신문에 담긴 제멋대로일 뿐인 기사는 너라는 인물을 제대로 담아내질 못했다. 소설 속 문장보다도 못 하지만 소설보다도 신비로웠던 기사.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보에 존경심이 들었고, 동시에 회의감이 들었다.
아, 코라 씨가 원한 D의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난 그날 이후로 그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그날 당기지 못 한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살아온 거니까. 네 이야기가 한 폭의 동화 같았다면,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나의 인생은 다른 의미로 소설 같았다. 이야기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이루어져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위기와 결말뿐이겠지. 베드 엔딩이 정해져 있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리어스물.
그렇게 널 처음 마주했을 때 든 감정은 기쁨도, 존경도, 경외심도 아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 마치 밝은 분위기의 소설과 어두운 분위기의 소설을 같은 공간에 놓아둔 듯했다. 나란히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섞이지는 않는.
지옥에 사는 사람은 천국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그저 지옥이 평범하다 믿을 뿐. 하지만 그런 사람이 천국을 알아버린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지옥에 있고 싶어 할까?
너의 대답은 글쎄, 난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한 편, 나는 네 이야기의 파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모두 모두 잘 살았답니다, 같은 김 빠지는 결말일지라도, 그 행복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베드 엔딩이 아닌 해피 엔딩을 보고 싶었다. 만약 내 이야기가 아닌 네 이야기를 함께한다면 내 결말도 달라질 수 있을까.
샤봉디 제도의 커다란 모니터로 보이는 현실은 그 무엇보다도 소설의 한 장면을 구현해낸 것 같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모두를 훌륭하게 구해내는 기적을 일으킬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전개 이후엔 위기가 있는 법이었다. 너는 계속해서 다치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 만을 반복해 너의 형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넌 주인공이 아니라 제 형제를 구하기 위해 절박하게 매달리는 한 명의 약자일 뿐이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본 넌 주인공의 기적처럼 간신히 살아 있었지만, 네 몸의 형태는 내가 여태껏 치료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 수술을 하는 방법도, 심장이 뛰는 것도, 피의 색깔도 모두 인간의 것이었다. 네가 항상 쓰고 다니는 밀짚모자도 그저 평범한 밀짚모자일 뿐이었고, 고통에 몸서리치는 네 목소리도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넌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인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이번만큼은 기적 대신 바다의 해협 징베를 그리고 네가 버틸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을 옳았다. 뉴스 1면을 장식한 네 생존 소식과 해군을 향한 도발. 그 전쟁은-아직 첫 서장에 불과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 너다, 도플라밍고. '밀짚모자 일당'은... 지금까지 온갖 기적을 몰고 다닌 녀석들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밀짚모자 일당을
"너는 못 쓰러트려...!!"
타아앙-!!
총알이 몸을 꿰뚫었다.